유년을 찾아서 (수필) 유년을 찾아서 (수필)
글/ 淸幽 김수미
가을바람이 차갑게 살결을 스친다.
도시의 소음을 뒤로하고 유년을 찾아 나선 길에 따뜻하게 맞아주는 고향.
한여름 물장구치던 개울가의 그 물줄기는 여전한데, 그 옛날 친구들은 어디로 갔는지.
고요함 속에 흐르는 개울 물소리는 더욱 아득히 멀기만 한 유년의 기억을 불러낸다.
차를 타고 마을로 들어서니 능선을 따라 이어진 고갯길에는 이름 모르는 들꽃들이
하늘거리며 나를 맞이한다.
이미 아득히 먼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유년의 시간이지만, 내 가슴에는 어린 기억 속의
친구들과 함께 걷던 그 고갯길이 환하게 그려진다.
울퉁불퉁 자갈들로 깔린 흙먼지 날리던 길. 그 길 위에 꽁지머리 묶고 들꽃 따서 손에 들고
산딸기 따 먹으면서 잠자리도 잡고 친구들과 노래도 부르며 달려가던 그 길에
중년의 모습으로 동심이 그리워 찾아가는 고향 길.
울퉁불퉁 자갈돌로 깔렸던 길에는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있다.
내 유년의 추억들도 저 포장도로 아래에 함께 잠자고 있겠지.
어린 기억 속의 멀게만 느껴지던 문중 산.
고갯마루까지 흙먼지 날리며 하루 5번 드나들던 유일한 버스는 아직도 변함없이
하루 5번 운행을 하고 있었다.
문중 산을 돌아보고 내려와 어머니 누워계신 선산에 오르니 멀리 고속도로가 보인다.
무덤가에는 할미꽃이 휘어진 허리를 하고 올망졸망 피어 있다.
어머니는 멀리 보이는 고속도로의 차들을 보면서 명절마다 자식들 생각을 하셨으리라.
자나깨나 늘 자식들 잘되기를 소망하시던 어머니. 이제는 산새 소리 벗 삼아 무덤가
이름 없는 꽃들과 나무들과 바람 소리를 친구 삼아 이야기를 나누시겠지.
바람에게 구름에게 서울 사는 아들딸 안부도 물어보시고 좋은 일들만 가득하고 잘 살라고
사랑의 언어로 말씀하시겠지...... 깊은 한숨 내쉬고 산에서 내려와 고향 집에 들어서니
코끝에 매달리는 그리움의 향기가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지나간 시절들이 그리워서 그러는지 허기가 진다. 서둘러 저녁 식사를 하고
차 한 잔을 마신 후, 대청마루에 나가 밤하늘을 바라다보았다.
무수히 많은 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머리 위로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가까이서 반짝거린다.
어린 시절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란 나를 아버지께서는 ‘사람은 흙을 밟고
흙냄새를 맡으면서 커야 자연 닮은 선한 심성을 지닌다.’ 고하시면서 초등학교 방학 때마다
시골 친할아버지 댁에 내려 보내셨다.
어린 나는 첫 시골나들이에 두려움과 신기함으로 시골 친구들과 방학을 보내게 되었고,
소박하고 정도 많던 다정한 친구들은 꽃 이름, 풀이름, 열매이름 머루, 다래, 산딸기, 오디 등등. 하나, 하나를 알려주었고, 산으로 들로 다니며 들꽃을 따서 꽃반지, 꽃목걸이도 만들어 주고 별들이 무수히 쏟아지는 듯 가득한 밤이면 개울가로 멱(목욕) 감으러 가서 물놀이하며
도깨비불이라고 부르던 반딧불이도 잡아서 병에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밝히며 놀았다.
친구 중에 나와 유난히 친했던 ‘영희, 숙자, 재숙, 금란이’는 매일 밤마다 함께 마루에 누워서
달과 별을 보며 서로 내 것, 내 것 욕심내며 까르르 웃던 웃음소리와 일들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마당에 모깃불 펴놓고 매운 연기에 콜록거리면서 마루에 나란히 누워서
서울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학교생활 이야기 등등. 밤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 나누며
바라보던 그날의 하늘이 지금도 내게 똑같은 모습의 달과 별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내 어린 시절 친구들도 같은 하늘을 바라보겠지. 저 하늘을 바라보며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우리 모두를, 우리 유년의 추억들을 기억하고 있으려나?
기억 속에 가슴속에 그리움과 보고 싶음이 물밀듯이 밀려든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을 품고 방에 누워 잠을 청하려 하나, 잠은 오지 않고 창문으로 수줍은 듯
들어오는 달빛에 방문을 살며시 열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설주에 기대어 앉아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잔잔하게 떠오르는 시어들과 함께 작은 시 하나를 적어본다.
*** 시(詩) / 가을밤에 ***
풀벌레 우는 가을밤
창문 사이로 살며시 들어온 달빛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해 방문을 조용히 연다.
문설주에 가만히 등 기대어
달빛과 눈을 맞추며 사랑에 빠질 즈음
시샘하듯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
나뭇잎 흔드는 소리에 먼 기억들이
내 가슴을 비집고 들어선다.
가녀린 떨림의 그리움들
뜰에 쌓이는 낙엽처럼
추억의 골짜기마다 밀려 들어와
잃어버린 기억들을 하나둘씩 되새김질한다.
불현듯 떠오른 마음의 접어놓았던 사연들
많은 시간이 세월과 함께 강물처럼 흘러가듯
가슴에 아릿한 통증을 주고 소리 없이 흘러가는
그것이 그리움일 것이다....
*******
가을이라는 계절을 앓으면서 유년을 찾아 나선 고향 길은 어머님의 따뜻한 사랑도,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기억들로 채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비록, 어린 시절의 그립고 보고 싶은 친구들의 모습은 만나지 못했지만, 어디에선가
내가 보는 하늘을 그들도 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잔잔한 행복함이 별들처럼 빛을 내고,
오늘 밤 유난히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은 환한 달처럼 가득히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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